자아실현과 욕구의 위계
인간의 모든 열정과 노력은 결국 인생을 통하여 각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는 이 정체성이란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를 만족 시키는 것이며,114) 이것은 자신을 완성하려는 욕구이자 개인이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를 계속 수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115) 그러므로 정체성은 ‘가능한 자아’를 이루는 과정상에 있는 것이며 그것은 장기적인 또는 단편적인 자아실현의 연속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하니(Karen Horney, 1885-1952)는 자아실현이란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골드스테인(Kurt Goldstein, 1878-1965)은 자아실현을 개인의 잠재력을 가능한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욕구이자 동기, 능력으로 이해하였다. 결과적으로 자아실현은 정체성이 성숙되는 과정이며, 자기 책임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것이다.
특히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의 동기와 성취를 단계적 발전을 이루는 ‘욕구의 위계(The Hierarchy of Needs, 1943)’로 설명하였다. 그는 인간은 5 단계의 욕구 만족을 통해 자신의 자아실현을 이루어 나간다고 생각하였다.118) 첫 번째 단계는 ‘생리의 욕구(physiological needs)’로서 식음, 배설, 수면, 성욕 등이다. 이 욕구는 본능에 의한 것이므로 그 욕구가 채워지면 사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발생하고 욕구에 대한 직접적인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욕구가 해소되지 않는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안전의 욕구(safety needs)’이다. 자연환경으로부터의 보호, 범죄나 경제적인 파산으로부터 안전한 환경을 확보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안전의 욕구는 인간의 신체 내부의 변화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닌 외부 환경의 영향 요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과의 유대관계를 통해 애정 및 소속감을 얻고자 하는 ‘귀속의 욕구(love & belonging needs)’이다. 이 욕구는 개인과 집단 또는 사회와의 관계에 의한 것으로 가족, 친구, 애인, 또는 동일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동아리 및 직장 등의 집단에 속하면서 감성적으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확인하는 것에 의해 이 욕구는 만족된다. 또한, 이 욕구는 일시적인 만족에 의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 또는 집단과의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통하여 만족된다.
네 번째는 ‘존경의 욕구(esteem needs)’로서 이것은 타인에 의한 믿음과 선망의 욕구이다. 사회로부터 자신의 역량, 능력을 인정받는 것으로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자신의 역량, 능력을 인정받을 때 그 욕구가 만족되고 이를 통해 자존감을 갖게 된다. 다섯번째 단계의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이다. 이 욕구는 삶과 존재적 가치를 자신이 인정할 때 가장 강한 자존감을 느끼게 한다. 매슬로우는 위 다섯 가지의 욕구 중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는 신체의 안정을 유지하는 생존의 본능에 따른 것이며 귀속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에게 정신적 만족을 줌으로써, 삶을 가치 있게 한다고 하였다.
매슬로우의 ‘욕구의 위계’는 구조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흥미를 주었지만, 인간의 여러 욕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였다는 점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120) 이러한 이유는 매슬로우는 인간의 유기적이고 비선형적(non-linear, 非線型) 욕구 체계를 자아 실현을 최종 목적지로 강조하는 선형적이고 단계적 구조로 ‘욕구의 위계’를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슬로우의 욕구 구조는 하부 단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상부 단계의 욕구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예를 들어 극도로 허기진 사람은 음식 이외의 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으며, 음식에 관한 꿈을 꾸고, 음식을 기억하며, 음식에 관한 감정을 드러내며, 오로지 음식에 관한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매슬로우는 후에 인간의 욕구는 선형적 즉 차례로 발생하지도 않으며,또 선택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허기진 사람의 음식에 대한 욕구는 안전과 생존에 대한 본능의 반사적 작용으로써 필수적이지만 우선 성취되어야 할 욕구는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귀속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 등은 사람마다 그 갈망의 정도가 달라서, 귀속의 욕구를 성취 하지 않고 존경의 욕구를 더 중요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아닌 스파이더 형(spider mapping)으로 설명하는 것이 매슬로우의 본 취지인 욕구와 자아실현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나타낸다. 즉 최종적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각 단계의 욕구가 만족 될 때 마다 그 단계만의 자기실현을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마지막 자아실현의 단계는 자아실현 그 자체가 욕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의 형성’이 욕구의 정체이며 그 만족의 결과 역시 다른 욕구와 마찬 가지로 자아실현을 통해 그 욕구에 대한 만족과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제품과 공간의 기능, 그리고 스타일의 동기가 되는 ‘편리의 욕구’와 ‘유희의 욕구’를 5 단계로부터 분리하여 7 단계로 정리함으로써, ‘정체성’과 ‘자아실현’, 그리고 ‘스타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편리의 욕구(convenience needs)’는 생존에 직접적 관련이 없으나 생활에서 편리성을 추구한다.
자동차, 가구, 전화기, 건물 등 특히 물리적 기능을 갖는 제품들은 편리의 욕구를 이루는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의 물질 환경의 대부분은 이러한 편리성 또는 쾌적성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품과 상품으로 구성되며, 거의 모든 제품의 구매에 대한 욕구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품의 구매는 신체적 편의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의 ‘가능한 자아’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 욕구의 만족은 직접적이고 빠르게 자아실현의 쾌감과 자존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상품의 구매 즉 쇼핑은 효과 있는 자기 보상의 방법이기 때문에 고가의 또는 구매 관여도가 높은 보석이나 자동차, 집, 등의 구입은 더 큰 자아실현과 자존감을 느끼게 한다. 매슬로우는 ‘유희의 욕구(pleasure needs)’를 그의 ‘욕구의 위계’ 중 ‘자아실현의 욕구’ 속에 포함해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에 관계된 필수적 욕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잉여적 노력과 창작활동은 이 유희를 동기로 한 것인데 이는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유희의 욕구를 노래와 춤을 추는 행위와 같은 유희적 행동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여행 또는 예술, 제품과 공간의 구입과 외형의 감상을 통해 얻기도 한다. 특히 제품은 유희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대표적인 것이다. 이때 제품이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그 사물의 편의적 기능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 사용한 사물이 적합한 기능을 할 때 욕구가 만족되고 그에 따른 긴장감이 해소됨에 따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제품의 유희적 기능은 사람들에게 필요의 만족과 즐거움을 제공하여 사람들이 그 물건에 깊은 동질감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다음으로 사물이 즐거움을 주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사물 주는 뛰어난 부가가치이다.
이것은 미적 스타일, 뛰어난 사용성 또는 내구성 등에 의해 그사물의 본질적 기능 이외에 그것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즉 제품의 본질적인 기능과 이것을 이루는 품질이 사용하는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만족’을 제공할 때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정체성의 욕구(identity need)’는 메슬로우의 자아실현의 욕구에 해당한다. 자아실현이란 자존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실현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의 구체화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상적 자아를 대신하여 가능한 자아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욕구는 주로 선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데, 그 선택이 자신의 정체성의 맥락에 포괄적으로 일치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의 욕구는 주로 자신의 태도, 신분, 가치관과 취향의 지속성을 이루기 위한 것 즉 자신의 스타일과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스타일은 정체성의 특성을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공유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인 사회적 태도, 신분, 가치관, 취향은 자신을 외부로 나타내는 인지적이고 가시적인 표현 요소인 것이다. 자아실현과 자아표현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며 매우 중요하다.126) 사람들은 이러한 선택과 자아표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구체화될 때마다 자아실현의 자존감을 느끼게 된다.
매슬로우의 존경심의 욕구나, 자아실현의 욕구는 큰 자존감을 높여주지만 이를 성취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기도 어렵다. 그러나 소비 즉 제품의 구매를 통한 구체적인 욕구의 만족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 더욱 많은 편리함과 유희를 주기 때문에 쉽게 자아실현의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즉 정체성의 욕구는 그사람의 태도나 가치관의 실행뿐 아니라 그 사람의 옷차림이나 사용하는 물건, 생활공간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사람이 소유한 물건은 누군가의 설명에 의한 것보다 훨씬 더 그 사람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의 자아표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시 자신의 스타일을 구체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특히 기능보다 상징성이 강한 상품 또는 공간의 데코레이션 등 표현적인 성향이 강한 것일수록 더욱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품의 구입을 통한 욕구의 만족은 현실의 ‘가능한 자아’를 위한 구체적인 정체성의 확인과 자아실현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즉 제품은 사용자의 취향을 표현하고,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게 하며,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보람과 애착을 갖게 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편의와 유희의 욕구를 바탕으로 하는 상품의 구매과 사용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고 성취감과 자존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효율적으로 반복하기 위하여 동일한 스타일의 제품을 구입하고 일관된 취향으로 자신의 공간을 연출한다.
이홍구. "스타일의 유형." 국내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